할아버지와 2차대전 by 함부르거

역사와 서민들의 이야기 에서 트랙백

할아버지가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가신 적이 있다는 것은 어릴 때 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종의 참전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2006년 경의 일이다. 그 때 정부에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조사(헥헥 길다)를 하는 것에 고무되어 우리도 보상 한 번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작은아버지가 부추기고 나와 동생이 나서서 할아버지의 증언(이랄까 이야기랄까)을 채록한 것이다. 나중에 피해자로 인정서를 받긴 했는데, 그거 말곤 아무 것도 없다. 할아버지는 별 관심이 없는 척 하시면서도 어떻게 되어 가나 간간히 질문을 하시곤 했다. 아마도 젊은 날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많이 하신 모양이다.

오히려 이제는 그 역할을 하던 위원회도 폐지 한단다. 참 뭐랄까 나라가 점점 더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일제 피해자 분들은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1945년 5월 경에 일본군에 징집되서 하마마쓰 근처 비행장으로 끌려가셨다. 일본군도 그 때는 막장이어서 그랬는지 군사훈련도 거의 없었고 총도 안쥐어 주고 작업이나 시켰단다. 아마 제2 국민역인가 해서 실전부대는 아니었던 듯 싶다. 장교들도 전부 노인네들이었단다. 중위가 50대 대위가 60대 였다니 아마 러일전쟁이나 1차대전 참전 예비역이었던 모양이다.

구일본군 하면 구타나 가혹행위가 연상되는데 할아버지의 부대는 조선인들만 모아 놔서 그런 것도 없었다고 한다. 하다 못해 작업도 별로 없고 산으로 들로 계속 이동하는 게 일이었다고. 아마도 지휘관이 별 의욕도 없고 오로지 살기 위해서 폭격을 피해 돌아다닌 게 아닐까 추측한다.

가장 힘든 것은 밥을 굶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밥 한 끼 주는데 양이 적어서 고생이었다고. 가끔씩 고구마나 감자 캐는 일 돕는 작업을 가곤 했는데 그 때는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한번은 주둔지인 비행장을 미군 B29들이 공습했단다. 방공호에 들어가서 다치거나 하지는 않으셨다는데, 폭격 어땠냐는 손자의 질문에 "아무 것도 없더라"는 아주 짤막하고 담담한 대답이셨다. 근데 그게 더 후덜덜하다. 폭격 끝나고보니 주변에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더라는 이야기니 말이다.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부대도 해체되어 버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이사지라는 곳에 계셨는데 하마마쓰까지는 걸어가고 시모노세키까지 기차를 탄 후 배를 타고 귀국하셨다.

그런데 군대 간다고 집에서 돈 깨나 싸줬던 모양인데 올 때는 차비도 없어서 집에 간신히 오셨더랜다. 왜 그랬나 했더니 같이 갔던 다른 사람들한테 배삯 기차삯으로 다 빌려주고, 당신님 표현에 의하면 "이것 저것 사먹느라" 다 써버리셨다고. 과연 무엇을 사 먹느라 그렇게 많은 돈을 쓰셨는지 심히 궁금했지만 할머니가 계신 관계로 못 물어봤다. 아직도 금슬 좋은 두 분 사이에 풍파 만들 필요 없지 않나. ^^ 암튼 지금도 할아버지는 먹는 거에 돈을 아끼지 않는 분이다. 얼마 전에는 동생이 할아버지 대접한다고 아무거나 드시라고 했다가 복집에 가셔서 왕창 털린(...) 적이 있다. 대인배 할아버지시다. ^^

그 때로부터 60년이 넘게 흘렀지만 할아버지는 그 때 돈 빌려줬던 사람들과 액수까지 아직도 기억하신다. "그 사람들 아직도 안 갚았다"고 툴툴거리시며. 할아버지 그 양반들 이젠 거의 돌아가시지 않았을까요. orz

할아버지가 2차대전에 관여한 것은 그게 전부다. 일종의 노동부대에 징집되어서는 3달 정도 일본 땅에서 있으면서 폭격도 당해 본 것. 그러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만 짓던 그 분께 그 경험은 아마도 강렬한 문화충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60년이 넘은 지금도 할아버지는 그 때의 일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그 때 배운 일본 군가도 잘 부르시니 말이다.

트랙백한 글을 읽으며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께는 아직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 분들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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