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란배 8강 이창호-구리 전

이창호라는 대해 앞에서 온갖 신묘한 재주를 부리며 용트림하다 결국 빠져죽은 구리.

어제 있었던 2008 춘란배 8강 이창호-구리 전을 한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무나 격렬하면서도 아름답고 또 극적인 승부였기에 글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제가 바둑을 보는 눈이 일천하다 보니 거슬리는 표현은 양해해 주시기를...

초반은 흑의 실리 - 백의 세력 구도였습니다. 집으로는 이득이었지만 너무 밑으로만 파고드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오더군요. 중반에는 구리의 페이스였습니다. 중앙부의 두터움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이 국수의 집을 착실히 깎아 나가더군요. 특히 좌변에서 벌어진 수순은 저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엔 너무 굴욕적으로 보였습니다. 집은 집대로 뺐기고, 선수는 선수대로 당하고... 이 국수의 돌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위태로왔고, 살아남기에 급급해 보였습니다. 엠게임 중계채널 해설을 맡은 이민진 5단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변화가 찾아온 것은 종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습니다. 지금 기보가 없어서 수순은 모르겠습니다만, 우상귀에서 중앙으로 한 칸 뛰면서 찝은 수가 너무나 명백한 구리의 실책인 192착 - 이건 아예 번호를 외웠음 - 에 반응하여 변화를 일으키면서 중앙의 백집을 다 삭감해 버리기 시작한 겁니다! 죽은 줄 알았던 돌까지 다 살아나면서 중앙의 백집은 전부 없어졌고, 구리에게는 승리의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후에 구리의 발악, 진짜 발악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수들이 이어지더니 결국 돌을 던지더군요. 1.5~2.5집 정도로 이 국수가 미세하게 이긴 바둑이어서 계가로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던졌습니다. 하긴 다 이겨 놓은 바둑을 끝내기에서 그렇게 말아먹었으면 계가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겠지만요.

만약에 구리가 192를 가지고 중앙부를 막는 단순한 - 그냥 아마추어라면 그렇게 뒀을 겁니다. - 수를 뒀다면 승부는 구리의 것이 됐을 겁니다. 그 때까지 잘 두던 그가 왜 그런 수를 뒀을까요. 보다 확실히 이기려는 욕심이었을까요. 착각이었을까요. 다 이겼다는 자만심이었을까요. 그건 구리 본인만이 알겠죠. 아마 지금쯤 꿈속에서도 그 장면이 눈 앞에 아른거리지 않을까요.

이 바둑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이창호란 사람의 깊이를 정말 절감했습니다. 그는 상황이 불리해도, 상대가 자신을 조롱해도, 온갖 굴욕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자신의 이치대로, 바둑의 이치대로 두어 나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는 어느 샌가 이치에서 벗어나고, 결국 하늘의 뜻처럼 처벌을 받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그 굴욕과 조롱도 이런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로 보일 뿐이지요. 그의 바둑을 보다 보면 분명 상대의 실수를 응징하며 이겨도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논리에 의한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대하고 깊고, 끝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망망대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창호는 분명 세계의 경이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타고난 것이 제게는 큰 행운입니다.

바둑이란 게임이 원채 시간이 걸리다 보니 실시간 관전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이라면 더욱 더 그렇죠. 백수의 좋은 점은 시간을 자기 뜻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오늘 이창호-구리 전을 실시간 관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백수가 된 것의 좋은 점을 느낄 수 있었던 이벤트였습니다. (자랑이다... -_-;;;) 아 그건 그렇고 공부할 시간에 이게 뭔짓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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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거 | 2008/12/10 01:25 | 雜記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mystery at 2008/12/10 01:57
이창호 답고, 구리 답네요.. ;;
하긴, 그러고보면 이창호와 같은 시대를 살며 그의 바둑과 삶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축복이군요.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08/12/10 13:04
'이창호 답다' 라는 말이 숙어가 될 지도... ^^
Commented by Hadrianius at 2008/12/10 09:13
봉수흉아 왈 "이창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기사들은 불운하다"
ㅡㅡ;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08/12/10 13:04
그 불운한 기사들이 특히 중국에 많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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