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 사태에 관하여. by 함부르거

노예가 아닌 이세돌 9단을 응원합니다.

위 링크한 글에 댓글로 쓰려다가 너무 길어져서 포스팅합니다.

요즘 바둑계는 많이 어렵습니다. 기사는 늘어나는데 - 입단 관문은 무지 좁지만 어쨌든 수졸은 매년 배출됩니다. - 스폰서는 오히려 줄고 있어요. 멀쩡하던 후지쓰배도 - 이건 일본기원 주관이지만 - 매년 적자를 내고 없어지느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몇년 전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때문에 한국기원 측의 입장도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가뜩이나 스폰서 잡기 어려운데 이세돌이 빠져 버리면 될 것도 안되거든요. 한국기원 측의 주장도 일리는 있어요. 바둑계라는 게 존재하고 나서야 이세돌도 있는 거니까요.하지만 기사 개인의 사정도 있는 거고, 그걸 잘 조정해서 피해보는 사람이 적게 해야 되는데, 한국기원의 행정력이 병신이라는 거는 옛날부터 유명한 거니까요... -_-;;;

이창호 9단도 한창 잘 나갈때 말도 안되는 일정으로 굴리던 게 한국기원입니다. 이창호가 워낙에 성인군자라서 참아온 거지 다른 사람 같으면 때려친다고 난리 쳐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이세돌은 보통 사람이니 당연히 오늘 같은 사태가 터지게 된 거죠.

프로기사는 프리랜서로 여겨지는 일이 많지만 사실 아닙니다. 엄연히 한국(또는 중국, 일본)기원과 계약을 맺고 있는 준노동자 신분이죠. 프로기사가 프로로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단위를 인정하고 대회를 개최하는 기원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죠. 기원과 프로기사의 관계는 조합과 조합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길드와 길드원이라고 하면 더 정확할까요?

기원이 기보 저작권을 가지는 것은 기보란 한 사람의 소유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죠. 일단 바둑을 둔 당사자는 2명입니다. 그 뿐 아니라 공식전은 기원에서 스폰서를 유치해서 개최하는 것이죠. 굳이 따지자면 기보의 저작권은 기사 두명, 스폰서와 기원이 가진다고 해야 합니다만 여태까지는 관례상 기원의 소유권을 인정해 온 거죠. 이번 건을 계기로 기보저작권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배분한다든가 하는 제도적인 개선을 할 여지는 있군요.

5% 상금은 프로구단의 임대선수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축구에서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선수를 임대보내는 일이 많이 있는데, 이 때 임대구단은 임차구단에게서 임대료를 받습니다. 중국리그 출전은 말하자면 한국기원에서 중국기원으로 기사를 임대보내는 것인데, 프로기사가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여기에 아무런 댓가를 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다만 왜 프로기사 개인의 상금에서 이걸 떼는가 하는 의문이 나오죠. 차라리 프로기사의 랭킹에 따라 임대료를 따로 중국기원에서 받는 게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암튼 기원 측에서 기사에게 일정 이상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MLB에서도 선수들이 윤리규정을 어기거나 하면 재제를 하잖아요. 여러 사람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비즈니스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한 사람이 규정을 위반하고 판을 망치고 있으면 단체 입장에서 가만 놔둘 수는 없지요.

다만 이번 경우는 '기원이 해야 할 일'(즉 일정 조정이라든가)을 제대로 안한 상태에서,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규정 - 임의로 정해져서 그리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  이라고 하는 것을 강제로 적용하려 하니까 문제가 심각한 겁니다. 저 위에도 적었지만 한국기원의 행정력은 문제가 많고 - 임의로 행하는 것이 많습니다. - 비합리적인 관행이 남아 있습니다. 위에 링크한 글에도 있지만 기원이 기사들을 위해서 하는 일은 적으면서 요구하는 것만 많으니까 문제가 터지지요.

저는 이세돌 더러 한국기원을 떠나라는 식의 주장엔 반대합니다. 그는 혼자 큰 게 아닙니다. 조훈현이 있고 이창호가 있고 다른 숱한 선배들과 싸우고 배우면서 지금의 위치에 온 게 아닙니까. 막말로 해서 한국기원이 없었으면, 한국기원에서 주최하는 아마추어 대회가 없었다면 그가 비금도에서 나올 수나 있었을까요? 그가 지금까지 공부했을 수천수만장의 기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숱한 선배와 동료들이 만들어낸 기보로 공부한 그가 자신의 기보로 벌 수 있는 몇 푼의 돈 때문에 한국기원을 떠난다면 그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사들의 입장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많은 기사들이 이세돌의 징계에 찬성했을까요? 그들이 이기적이라서? 글쎄요. 이세돌이 상금을 벌기 위해선 그에게 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둑은 상대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당장 이세돌이, 혹은 다른 일인자가 상대를 모조리 이기고 상금을 싹쓸이해서 가져가면 개인에겐 좋겠죠. 하지만 그 때문에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바둑기사가 나온다면, 그래서 프로기사 지망생들이 '일인자가 못된다면 인생 망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프로기사를 지망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바둑은 상대가 있어야 성립합니다. 우수한 프로기사가 계속 나와주지 않는다면 바둑이란 스포츠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세돌의 화려한 전적 뒤에는 그에게 패한 숱한 기사들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프로기사들 중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도있다고 합니다. 아예 프로가 되지 못한 연구생 출신들은 더더욱 기가 막히죠.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이세돌보다 엄청 못하나?아닙니다. 말 그대로 한 수, 아니 반 수가 부족하죠. 아마추어들에겐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프로기사들입니다. 한국기원 연구생이 일본 가면 프로들 떡실신 시킵니다. 이세돌은 그런 사람들의 희생을 밟고 서 있는 거죠. 그게 일인자라는 겁니다. 그런 일인자에게 일인자에게 합당한 의무와 품격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불합리할까요? 의무와 품격의 기준이 불합리할 수는 있어도 그런 요구 자체는 정당하다고 봅니다. 조훈현도 이창호도 그것을 알기에 힘들어도 버텨왔던 겁니다.

이번 사태는 이세돌 개인과 바둑계 모두에 불행한 일입니다. 그동안 바둑계는 외형적 발전에 비해서 시스템 정비가 부족했습니다. 기사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는데 바둑판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발전이 없었습니다. 관행적으로 행해져 왔던 많은 일들을 하나 하나 따져보고 보다 합리적인 마인드로 변화시킬 수 있는계기가 되기를, 그래서 전화위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기원 관계자들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이세돌은 당분간 쉬면서 머리도 식히고 재충전해서 나왔으면 합니다. 최근 대국수가 너무 많아서 고생하던 게 보이거든요. 그리고 선후배들도 좀 만나면서 이야기도 들어보고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깨달았으면 합니다.



한줄 요약 - 이세돌도 한국기원 측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한국기원의 병신같은 행정력은 어떻게 좀 할 수 없나?

덧글

  • 켄라즐로 2009/06/25 00:47 # 삭제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새벽햇살 2009/06/30 23:14 # 삭제

    바둑과 사람에 대한 혜안이 있으신 거 같네요. 완전 공감하지는 않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새벽햇살 2009/06/30 23:14 # 삭제

    바둑과 사람에 대한 혜안이 있으신 거 같네요. 완전 공감하지는 않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함부르거 2009/07/02 02:13 #

    졸문에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다 생각을 정리해서 썼어야 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좀 난잡하군요.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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