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소설의 독 by 함부르거

김용소설, 단순히 민족간의 화해만 있었을까? 에서 트랙백.


김용 소설은 무척 재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 중에서 상당한 부분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이 김용이 창조한 가상의 인물들과 어우러지는 데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이 징기스칸의 사위였다거나 하는 식이죠. 그렇게 녹아 들어간 인물들 덕에 독자들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용 소설의 문학적 가치는 상당부분 그것이 역사소설이기도 한 점에 있습니다.

이 부분에 김용 소설의 독이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하셨죠. 역사가 진행되는데 이민족과의 전쟁이 빠질 수 없습니다. 김용은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소설에서 이민족과의 전쟁을 중심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는 김용 소설에서 이민족은 중원문화의 우수성을 돋보여 주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김용 작품의 중심내용이 이민족과 한족의 대립에서 한족이 궁극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김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비록 이민족들에게 중화가 짓밟힌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중화가 승리하고 중화가 모든 면에서 가장 우수하다.' 김용 소설에서 다른 민족의 문화 같은 건 길바닥의 껌취급입니다.

김용은 초기엔 노골적으로 한족 찬양을 해댔죠. 서검은구록(고려원판 제목은 청향비) 같은 초기작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건 건륭제가 원래 한족의 아들이라는 내용이니... -_-;;;

이후의 작품에서는 그 방법이 더욱 교묘해집니다. 이민족의 승리를 보여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중화가 우수함을 보여주는 것이죠.무공의 예를 보면, 한족의 무공이 최고라는 묘사가 거듭 나옵니다. 장무기가 서역에서 들어온 건곤대나이로 팔괘장을 깨면서도 상대의 내공이 낮아서 이긴 거지 무학 자체의 오묘함은 팔괘장이 더 뛰어나다는 식이죠. 이민족이 이기면 그놈 하나가 잘나서 이기는 것이고 한족이 이기면 그 무학이 이민족의 무학보다 뛰어난 것이죠.

부분적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이민족들을 보면 대체로 그 뛰어남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군주들입니다. 쿠빌라이, 강희제, 홍타이지, 징기스칸 등등... 잘 보면 이민족이 흥성한 이유는 그들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군주 개인이 우수했기 때문에 흥성한 것이고, 중화는 멍청한 황제와 부패한 신료들 때문에 망하는 것이지 중화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니다는 주장을 은연중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김용 소설에는 이런 사상을 은연중에 침투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휴먼스토리의 바탕에는 중화제일주의가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어릴 때는 이런 면을 모르고 봐서 한때 중국문화에 대해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중국문화의 우수성을 높이 우러러 보던 시절이 있었죠. (먼산)

제가 이런 환상을 깬 것은 서검은구록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이 작품은 김용이 최초로 쓴 소설인데, 확실히 초기작이라 아직 소설기법이 능숙하지 못해서 중화제일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거든요. 역겨울 정도의 중화민족주의가 드러난 작품을보고 나니 그때부터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런 면들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이것이 김용 소설의 독입니다. 이런 면을 직시하지 못하고 김용의 소설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중화사상에 녹아들게 됩니다.중화권 독자들에게는 당연할 지 모르지만 우리같은 주변민족들에게는 매우 경계해야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용 소설을 읽거나 권할 때는 이런 점을 알고 읽어야겠죠.



사족으로 몇몇 작품들을 정리해 보죠.

서검은구록 - 위에 이야기했지만 건륭제는 옹정의 자식이 아니고 한족 출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족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오랑캐의 황제노릇 하는 형제에게 터뜨리는 주인공의 비분강개(...)가 필견감이죠. ^^

사조영웅전 - 곽정은 징기스칸에게 큰 은혜를 입지만 결국 중원으로 돌아가 몽골과 대립합니다. 수십년간 전쟁만 하던 전쟁전문가인 차카타이와 주치가 중원의 병법을 익힌 초보자 곽정한테 발립니다.

신조협려 - 최고 악당이 서역의 라마승 금륜법왕이죠. 최고의 서역무공을 익혔지만 결국 양과한테 끝장납니다. 몽케 칸도 양과의 손에 끝장납니다. 남송의 군대가 전부 협객이었으면 세계정복도 했을 겁니다.

의천도룡기 - 내용 자체가 몽골족 몰아내기. 서역인인 달마가 쓴 구음진경과 나중에 중원인이 쓴 구양진경을 비교하면서 구양진경의 손을 은연중 들어줍니다.

천룡팔부 - 특이하게도 거란인과 대리국인이 주인공인 소설입니다만, 결국 중화만만세가 내용이죠. 원래 거란인인 소봉(교봉)이 결국 자신을 키워준 중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눈물나는 휴먼스토리.

벽혈검 - 명나라가 망한 것은 원숭환을 죽인 숭정제 때문이고~ 이자성이 제대로 했으면 오랑캐들은 여전히 산해관 밖에 있을 것이고~

녹정기 - 제일 평가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중화사상을 가장 교묘히 감추고 있는 작품이죠. 그래도 중국에선 일반적인 술수로 러시아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공주까지 싸바싸바해버리는 것을 보면 중화제일주의는 어디 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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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부르거의 이글루 : 김용 선생 돌아가셨네요... 2018-10-31 02:41:36 #

    ... 을 불살라 읽었던 무협소설의 창작자, 위대한 김용 선생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이 분의 소설을 읽고 몇날 며칠을 그것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죠. 머리가 굵어지고 나선 이 분을 까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소설들입니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죽게 되어 있지만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건 ... more

덧글

  • 키세츠 2009/08/18 09:42 #

    그저 재미있게만 읽은 소설이 이런 독을 품고 있을 줄이야!!!!

    근데 개인적으로는 김용소설은 읽다보면 "이게 다 뻥이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중화사상이 점점 우스워져요. 덧붙여 나중에 신조협려(제가 제일 좋아하는 김용 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을 보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손발이 오그라들죠.

    중화제일 무공인데..... 중화제일 무공인데 저런 CG라니..... 훌쩍
  • 함부르거 2009/08/18 17:14 #

    신조협려 최근작은 그야말로 공포였죠. 미소년 양과는 어디 가고 왠 찐빵이 나와... orz

    그리고 저도 머리가 굵어지면서 김용 소설의 문제가 보였죠. 초등-중학생이 그게 중화사상인지 뭔지 알 게 뭡니까. (먼산)
  • 페이퍼 2009/08/18 12:31 #

    재밌게 잘 봤습니다. 각 소설의 내용들을 요약을 잘해주셔서 눈에 쏙 들어오네요...^^
  • 함부르거 2009/08/18 17:14 #

    감사합니다. ^^
  • 나도사랑을했으면 2009/08/18 23:12 #

    우리나라도 일제시대를 다룬 소설등 문학에서 그런요소를 심하게 넣지 않나요?

    그리고 서검은구륵의 경우...아니 17세기 중국사에서 악역은 분명히 청정권 이 맞는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죄없는 양민들은 17세기 중후반 내내 저질렀습니다. 특히 양주등에선 대학살을...

    뭐 나중에 청나라등에 연고지가 있는 민족이나 정권이 생기고 중국이 분열할지 안할지 모르겠으나.....
  • 함부르거 2009/08/19 01:22 #

    우리 나라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여기서 논할 만한 일이 아니군요. 김용 소설을 비판하는데 난데 없는 한국 문학이 나올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본문에도 썼지만 중국인이 중화사상을 가지고 글 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당연하죠. 전 그런 면을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밝힌 겁니다.

    청 정권이 나쁜 일도 많이 했지만 중원에 안착하고 나선 명나라보다 정치를 훨씬 잘했습니다. 그건 김용 조차도 녹정기에서 고염무, 황종희 등의 입을 빌려 인정을 하는 부분이죠. 어느 왕조건 잔혹한 일을 하지 않는 정권이 있었던가요?

    중국 분열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본문과는 상관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댓글로 논할 만한 주제도 아니구요.
  • 나도사랑을했으면 2009/08/18 23:24 #

    (그렇지만 전 청나라가 중국사인가 아닌가등 논란이나 현재의 중국이 청나라를 계승했나등에 대해 중국사이다라고 생각하고 청과 중화민국등의 관계는 정권교체등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서검은구륵 얘길 하자면...이것은 반청복명이 주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이게 나쁜건가요? 물론 영웅문등을 보면... 중원의 인물들이 매우 대단한 존재로 나옵니다.(객관적 역사사실 송이 문약한 왕조라는 사실과 몽고가 엄청난 무력의 나라라는것... 그리고 중국사에서...북방이민족 왕조의 전투력 및 당시 중화 왕조와등과의 접전에서 크게 승리한적이 많다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등에 대해선 많이 아쉽죠.... 이를 제외하고 소설등에서 무지막한 행위를 저지르는 폭압정권에 대해 일어나거나 빼앗긴 강산등을 되찾으려는 행위(반청복명같은....) 및 그것을 높이는 것등에 대해선 별로 타치할일은 없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했듯이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에 대해 학술서적에서부터....창작물에 이르기 까지...너무 일방적으로 그런 입장을 강요하고..하지 않나요?
  • 함부르거 2009/08/19 01:43 #

    청나라 중국사 맞습니다. 본인들이 명나라를 계승했음을 명확히 밝혔는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것도 본문과는 전혀 상관 없군요. 전 그 문제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서검은구록, 녹정기 등의 반청복명 운동의 선악에 대해서 전 논한 적 없습니다. 제 글에서 뭘 읽으신 지 모르겠군요? 저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뻔뻔하게 중화사상을 드러낸 것을 문제삼았을 뿐입니다. 반청복명운동이나 그것을 높이려는 김용의 의도에 대해서 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오로지 한족의 입장만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고 청 정권의 입장은 전혀 고려된 게 아니죠. 반청복명이라고 하지만 청 제국의 입장에선 그냥 반역자 아닙니까? 그것도 성공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강희-옹정-건륭에 이르는 태평성대(물론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를 뒤집으려는 반역자 말예요. 김용 자신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녹정기에서는 강희제를 축으로 청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습니다.

    관점을 좀 다양하게 취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군요. 김용 소설이 워낙 걸작이다 보니 읽다 보면 주인공의 논리, 즉 한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건륭제의 입장, 징기스칸의 입장, 무엇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시라는 말씀입니다.

    김용의 작품은 당의정과 같아서 재미라는 껍질 속에는 중화사상의 독이 들어 있죠. 단물만 빨 것이냐 독까지 먹을 것이냐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독이 있다는 것은 알고 먹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위 덧글에서도 말했지만 일제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여기서 논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강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영훈 교수 같은 사람도 잘도 책 내는 것을 보면 그 강요라는 것도 대단찮은 모양입니다.
  • Esperos 2009/09/16 19:13 #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양강이 본디 한족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키워준 양부의 은혜와 정, 그리고 황실의 지위라는 것을 잊지 못하여 금나라 편을 듦을 캐탄하지요. 만약 자기 아버지 의형제의 아들만 아니었으면 '캐탄'이 아니라 '타매'하며 때려 죽였을지도 모를 만큼요. 김용은 양강을 더더욱 못된 놈으로 묘사하고요.

    하지만 천룡팔부에 나온 교봉은 본디 거란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한족 품에서 자라 정체성 문제로 번뇌하다 끝끝내 한족 편에 섬을 영웅다운 기개인 듯 묘사합니다. 사조영웅전의 양강의 경우와 천룡팔부의 교봉의 경우는 정반대거든요. 하지만 김용은 '한족 편에 서면 선, 안 서면 악'이라는 결론을 내리지요. 양강이 한족인데도 한족 아닌 편을 골라 못된 놈이라면 교봉은 마땅히 거란인 편에 서야 하는데도 말이죠.

    의천도룡기에서 건곤대나이는 무학 수준이 중원의 무학에 못 미침을 기기묘묘함으로 커버함으로도 모자라, 근본적으로 마성이 깃든 사도로 묘사했지요. 다만 불교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게 치는데, 그건 이미 불교가 중국의 전통종교 수준으로 정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금모사왕이 소림사에 승려로서 입문한다고 했겠지요. 명교 입장에선 기가 막힌 일 아니겠습니까.
  • 함부르거 2009/09/16 23:38 #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똑같이 양아버지를 따라도 한족을 따르면 영웅, 여진족을 따르면 악당... 상당히 이율배반적이지요.
  • 윤환 2010/07/04 13:11 # 삭제

    고딩때 읽었을때는 잘 몰랐는데 오랜만에 주성치의 녹정기를 보고 다시 녹정기를 읽어 봤지요, 역시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을 참 잘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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