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빛 트로츠키를 보면서 느낀 건데... by 함부르거


1930년대의 일본은 일을 벌릴 생각만 하지 벌린 일을 수습할 생각하는 인간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츠지 마사노부가 트로츠키를 데려다가 연해주에 유태인 자치주를 세우겠다는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대목에선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벌여 놓고 뒷수습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중일전쟁도 끝없는 수렁으로 들어가던 상황에서 확전을 하겠다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해야 나오는 것인지 이해 불가...

그런데 이게 츠지 한 사람의 성향이 아니라 그 시대 일본에서 대외 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다 비슷한 거 같다는 게 골때리는 대목이다. 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처형된 오자키 호츠미 같은 사람은 또 소련하고 연대해서 미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시와라 칸지는 나중에 좀 정신차리긴 하지만 소련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봤다. 각각의 사상이나 지향점은 다르지만 이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은 다들 자기 생각대로, 계획대로 상대가 움직여 줄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외교가 됐건 전쟁이 됐건 먼저 상대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서 계획을 짜야 하는데 이 당시의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계획을 먼저 짜고 상대가 그에 맞춰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된 원인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인재육성 시스템에 있지 않나 하는 게 내 생각인데, 츠지 마사노부나 도조 히데키 같은 잔머리만 좋은 돌아이들이 출세한 것은 당시 일본의 인재 육성, 평가 방식이 상당히 글러먹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일이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일본의 문화가 이렇게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은 하는데 책임지는 놈은 없는 게 일본 시스템의 특징인데, 이게 일이 잘 돌아갈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 사실 어떤 시스템이든 잘 될 때는 문제가 없다. - 조금만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지면 엉망진창이 되는 문제가 있다. 

1930년대는 당시 일본이 처한 각종 국가적 문제들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온갖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계획을 짜고 실행해 보던 시기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책임지는 놈이 없다 보니 이시와라니 츠지니 하는 또라이들이 튀는 계획을 내놓고 밀어붙이면 막을 수가 없었고, 뒷수습이 안되니 문제는 더 커져가는 악순환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악순환이 누적된 결과가 1940년대의 파국적인 행보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만든다'는 게 당시 일본의 스타일인데, 오늘날의 일본에도 겹쳐 보이는 게 기묘한 노릇이다. 지금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가 딱 그 당시의 인물들과 겹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현재의 일본이 처한 문제 - 심각한 고령화, 쇠퇴해 가는 경제, 방사능 오염 등등 - 에 대해 나름대로 해법이라고 내놓는 게, 명확한 전략적 방향성을 가진 게 아니라 각각의 튀는 개인들이 제멋대로 내놓는 계획이 뭉뚱그러진 결과로 보이는 것이다. 아베의 앞뒤가 안맞는 대외정책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고.

특히나 지금 일본의 외교정책이라는 것은 자기네들이 이렇게 나오면 한중이 자기들 뜻대로 움직여줄 거라고 믿고 내놓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강하다. 무라야마-고노 담화 계승이란 카드를 내 놓으면 한국이 자기네들 계획대로 유화적으로 나올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정상회담 하나 성사시키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한중의 생각을 이해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30년대 일본의 행태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아베 신조가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게 더더욱 그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시는 만주국 창건의 주역 중 하나다. 만주사변-중일전쟁-노몬한 전투-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막장 행보의 중심에 만주국이 있다. 만주국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우리 나라에선 이해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만주국이란 나라는 당시 일본 우파들의 이상이 녹아 있고, 또 그 문제점도 모두 들어있다고 봐도 좋다.  한마디로 그 시대, 그 장소,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는 역사의 특이점이랄까. 당장 故 박정희 대통령만 해도 만주국 장교 출신이 아닌가 말이다. 좋건 싫건 만주국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시대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 나라와 동북아 정치, 외교의 문제를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무지개빛 트로츠키'는 지금 더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때론 일본인의 입장에서, 때론 중국의 입장에서, 때론 러시아와 조선의 입장에서 다양한 각도로 만주국과 30년대를 조명하고 있다. 생동감 있는 그림과 풍부한 자료조사는 덤이고.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그 시대를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데는 이만한 책이 없을 듯 싶다. 

사실 비슷한 시대, 장소를 다루고 있는 만화로 무라카미 모토카용(龍)도 있다. 이 쪽도 상당한 걸작이니 읽어보면 좋다. 헌데 무지개빛 트로츠키 쪽이 좀 더 밀도가 높다. 주제의식도 더 강하고 압축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느낌이다. 

1920~30년대라는 시대는 우리 역사에 있어 하나의 공백기와도 같은 시대다. 그 시대에 우리는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간과정이 없는 결과는 없다. 그 전후의 우리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품들이 보다 많이 소개되고 읽혔으면 하는 바램이다.



ps. 만화 이야기이지만 역사 주제이므로 역사 밸리로.

덧글

  • 2014/03/25 15: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함부르거 2014/03/25 16:26 #

    그래도 일본 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래 댓글에도 있지만 우린 반쪽짜리 혁명이라도 해 봤잖아요.
  • 2014/03/25 16: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3/25 17:1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windxellos 2014/03/25 15:16 #

    다만 이 작품도 그렇고, 이전에 만주국을 다루었던 '나라가 불탄다'도 그렇고, 이 분들은 대체로 만주국에 대해 '본질적인 의도는 좋았다'라는 정도로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만주국에 소위 '오족협화'를 진실로 믿었던 사람이 아주 없지야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게 각 작품의 주인공들이 소위 '이상적인 만주국 이념'을 내세우며 (나쁜 사람들 때문에 변질됐을 뿐)'원래 의도는 좋았다니까?'라고 강변하는 듯한 모양새라 그 부분은 좀 보기가 미묘하더군요.
  • 함부르거 2014/03/25 16:40 #

    나라가 불탄다는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이죠. 이것도 상당히 잘 된 작품입니다.

    저는 windxellos 님과는 약간 견해가 다릅니다. 제가 느끼기엔 이런 작품들은 만주국의 이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이시와라 칸지 같은)들도 보여주지만 그 모순과 한계점도 보여주거든요. 특히 무지개빛 트로츠키에선 주인공의 입을 빌어 헛소리 말라고 까기도 하구요.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는데, 제가 느끼기엔 만주국 건국 주역들의 행적을 가감 없이 보여 줘서 오히려 더 그 모순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 windxellos 2014/03/25 20:56 #

    아,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도가 좋았다'라고 전적으로 믿었다기보다는 '일부 그렇게 여기는 부분도 있었던(없지 않았던)것 같다'는 정도의 이야기였습니다.

    말씀대로 모순과 한계점, 현실의 악의도 충분히 보여주고는 있습니다만, 정작 독자들이 가장 이입하게 되는 주인공들이 비록 현실 앞에서 좌절은 할지언정 그 '이상'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다 보니 좀 갸우뚱해지는 것이죠.

    제 경우 무지개빛 트로츠키에서 움보르토가 게릴라 활동 중에도 만주국기를 휘날리고 다니는 모습이 꽤나 작위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여화가 그걸 오족협화 구호와 함께 까고 있기는 하지만 여하간 하필 주인공이 깃발을 들고 있는 장면이란 말이죠.

    말하자면 뭐랄까, '만주국이 괴뢰국이고 침략이고 다 맞는데 이런 이상도 있기는 있었다.' 라는 측면을 일부러 자연적인 것보다 약간 더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가 그렇게 봤다는 것이고, 말씀대로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나 불편하게 여기는 부분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 함부르거 2014/03/26 03:25 #

    전 그 장면이 태생적으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움보르토의 경계인으로서의 운명과 역사의 사생아인 만주국의 공통성을 나타내는 걸로 보았습니다. 일본인도 몽골인도 될 수 없는 움보르토와 가짜 국가 만주국. 어딘가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 유링 2014/09/02 16:40 # 삭제

    제생각에는 의도는 좋았으나 나쁜이에게 변질되었다..라기 보단 처음부터 의도가 나쁜 것을 숨겼고 오히려 일부 순수했던 사람은 거기에 속아 이용을 당했다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합니다.
  • 지나가던과객 2014/03/25 15:57 # 삭제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하면 우두머리를 갈아본 경험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이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국은 왕도 한 명 죽여보고, 귀족이 왕도 위협하고 쫓아내고 왕가도 다른 나라에서 꾸어오고(?)한 경험이 있는 반면에, 일본은 천황이라는 왕이 있는데 한 번 권력을 잃고 나서 밑에 장군이라는 놈이 지가 다 해처먹는 체제 아니었습니까? 책임 질 일이 생기면 천황한테 미뤄버리고 지 할 것 다한거죠.
  • 함부르거 2014/03/25 16:41 #

    일본은 한번도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는 나라라고 하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和가 악용되면 그런 무책임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 붉은10월 2014/03/26 02:56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와 <무지갯빛 트로츠키>는 현재의 한중일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온고지신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귀한 작품이지요.
  • 함부르거 2014/03/26 03:21 #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격동의 전환기였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하니까요.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3/28 01:15 #

    지금의 한국 정부의 외교야말로, 일본의 생각을 이해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30년대 일본의 행태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 함부르거 2014/03/28 01:40 #

    먼저 도발하고 있는 것은 일본. 선후관계를 뒤집어 생각하는 당신같은 사람과는 난 할 말이 없어요. 댓글란이 더러워지길 바라지 않으니 부득이하게 차단합니다.

    악성 네임드가 찾아오긴 또 처음이네.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3/28 01:44 #

    그것은 너무나 자국 중심으로 한 견해다. 정말로 마치 1930년대의 일본과 같은 사고방식이다. 외교에는 쌍방에 주장이 있다. 일본으로 보면, 2012년5월이후,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게 된 원인은, 8월에 독도 상륙 강행, 천황폐하 비방을 한 한국측이 도발해 온 것이다.
  • 함부르거 2014/03/28 01:48 #

    아 XXX... 이 인간 또 이러네. 무슨 봇도 아니고... 차단 먹이는 사이에 언제 또 들어왔지? 새벽 시간인데 잠도 안자나. -_-;;;;

    차단 조치 완료했구요. 또 들어오시면 보는 족족 삭제합니다. 내 블로그엔 처음이지만 다른 블로그에서 하던 짓을 충분히 봐 왔기 때문에 이러는 거니 이해 바랍니다. 자기 자신이 한 짓부터 좀 돌아 보시길.
  • 호랭총각 2014/09/19 00:39 # 삭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함부르거 2014/09/19 15:31 #

    넵 아주 좋은 책입니다.
  • 과객 2014/10/07 12:31 # 삭제

    무라카미 모토카의 용은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죠. 정말 그렇게 완벽하게 극우적 욕망을 은폐해서 미화하는 작품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똑바로 보고 뒤집어보고 옆으로 봐도 중국인들에 대한 조롱과 만주국 판타지와 극우또라이 미화로 가득 찬 작품인데, 언뜻 읽으면 겁나게 반성적인 작품처럼 보인단 말이죠.
  • 함부르거 2014/10/07 12:49 #

    흠... 전 그런 부분까지는 모르겠던데요... 다시 한번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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