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퀴아오 vs. 제프 혼 by 함부르거


파퀴아오 경기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가 - 우리 나라에선 복싱 소식은 찾아서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지요. - 우연히 목욕탕에서 틀어 주길래 7라운드부터 봤습니다. 뭐 해설자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전 라운드의 양상도 7라운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겠더군요. 자세한 건 전체 경기 영상을 봐야겠습니다만.

오랜만에 아주 재밌는 복싱 경기였습니다. 결과를 떠나서 말이죠. 딱히 파퀴아오 팬도 아니지만 경기 자체는 매우 흥미로왔죠.

경기양상을 한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젊고 체격과 힘이 월등한 도전자가 노련하지만 노쇠한 챔피언을 밀어 붙인 끝에 힘으로 따낸 승리라고 해야겠습니다. 나이 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도 해야겠죠. -_-;;; 

결과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저는 제프 혼이 이길 만한 경기를 했다고 봅니다. 파퀴아오의 링 캐리어가 한두해인 것도 아니고 비슷하게 밀어붙이는 상대들을 수도 없이 때려 눕혀 온 선수 아닙니까. 상대의 전략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파퀴아오의 패배인 거죠. 원정 경기인 것도 있구요. 특히나 호주의 야외 링은 원정 선수들에겐 아주 부담스런 장소입니다.

제가 볼 땐 제프 혼 쪽 스탭이 아주 전략을 잘 짰어요. 테크닉 면에선 상대가 안되지만 부딪히는 걸 두려워 않고 접근전으로 밀어붙이면서 조금만 틈이 벌어질 만 하면 클린치로 파퀴아오가 펀치를 못 내게 막는 걸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버팅이 많이 발생한 것은 의도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확실한 건 버팅을 각오 하고 들이밀었다는 겁니다. 메이웨더와는 정반대 스타일이지만 파퀴아오의 발과 펀치를 묶는다는 점에선 공통된 요소가 있습니다. 로베르토 두란 대 슈거 레이 레너드 1차전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체격과 힘의 우위에 자신이 있었기에 짤 수 있는 전략입니다.

물론 코칭스탭의 전략을 잘 수행한 제프 혼 선수도 훌륭했습니다. 파퀴아오만한 선수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전진하는 건 보통 배짱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죠. 특히 9라운드의 위기를 넘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선수가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를 보면서 내내 느낀 건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겁니다. 9라운드에서 파퀴아오는 경기를 역전시킬 수 있는 찬스를 잡았습니다. 확실하게 정타를 먹였고 제프 혼이 정신 나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거기서 추격타를 못 먹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파퀴아오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죠. 도전자의 전략이 너무 뻔한데 그걸 저지하지 못하는 모습은 실망스럽다기보단 안타깝더군요.

그러나 이 경기는 동시에 매니 파퀴아오라는 위대한 챔피언의 품격을 보여준 경기이기도 합니다. 경기 끝까지 그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안풀린다고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스탭들이 화를 내는 와중에도 그는 냉정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끝에 판정으로 졌습니다. 한 시대의 챔피언이 이렇게 멋진 경기 끝에 패배하는 건 마치 늙은 숫사자가 젊은 도전자에게 물어 뜯기면서도 고고하게 버티다가 석양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멋있게 진다는 건 이런 겁니다.

파퀴아오는 이제 은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멋진 경기 끝에 물러나는 게 누구에게나 좋아요. 괜히 재기한답시고 추태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레너드의 마지막 복귀전은 코미디나 마찬가지였죠. 그런 꼴사나운 모습은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


ps. 새삼스럽지만 토마스 헌즈와 레너드는 어떤 괴물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추럴 웨이트가 웰터급이었던 레너드나 미들급 정도였던 헌즈가 라이트 헤비급 선수들을 KO시킨 걸 보면 말이죠. 파퀴아오는 플라이급에서 시작했고 내추럴 웨이트는 라이트급 정도 같은데, 이젠 웰터급은 무리라고 보이니 말입니다. 델라 호야도 체급을 올리면서 KO는 못 시켰다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덧글

  • 홍차도둑 2017/07/03 20:49 # 답글

    로베르토 두란의 은퇴전 상대의 그 말은 언제나 슬픕니다.

    "내가 존경하고 나를 복싱으로 이끈 그 전설을 내가 그렇게 때린다는 것은...차마...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 함부르거 2017/07/04 01:00 #

    슬픈 일이지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고 새사람은 옛사람을 갈아치우는 것이 세상의 이치지요... 파퀴아오의 시대도 이제 끝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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