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블렌딩 일지 by 함부르거

커피를 볶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되었지만 블렌딩은 이번에 처음 시도했습니다. 그냥 알고 있는 원두 하나와 인터넷에서 설명 보고 대충 고른 원두 하나를 섞어서 볶았는데 결과물이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감동적일 정도네요. ^^=b

이번에 배합한 원두는 수마트라 만델링과 파푸아 뉴기니 아로나입니다. 사놓고 보니 둘 다 섬나라 출신이네요.

수마트라 만델링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원두입니다. 이전에도 볶아 봐서 장단점을 잘 알고 있죠. 제가 로스팅 일지를 쓰는데 거기 써 놓은 표현을 그대로 옮겨 놓아 볼게요.

설탕 같은 것을 하나도 안 썼는데 단 맛이 느껴진다. 산뜻한 꽃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맛. (2015. 8.24.)
단 맛과 산뜻한 뒷맛. 향은 좀 약하나 혀 끝에서의 느낌이 아주 부드럽다. 복잡미묘하고 풍부한 바디감.(2015. 8.24.)
강배전으로 산미가 줄어들면서 향기와 단 맛, 바디감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강배전을 추천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줌. Fantastic! 마시고 나서도 맛의 잔향이 길게 남는다.(2015.9.11.)

보다시피 만델링은 전체적으로 바디감이 풍부하고 단맛이 나며 뒷맛의 여운이 오래 남는 원두입니다. 대신 향이 약한 게 유일한 흠이죠. 그래서 향을 보완해 줄 원두를 찾았고 그게 파푸아 뉴기니 아로나였습니다.

파푸아 뉴기니 아로나 A를 처음 볶았을 때의 일지를 옮겨 놓아보죠.

볶고 나서 맡은 향기는 달콤한 꽃향기. 산뜻하고 부드러운 맛. 바디감은 약한 편. 꽃향기에 풀냄새도 난다. 섬지역이 커피의 특징인 부드러움과 산뜻함이 두드러진다. 처음 입에 닿아서 넘어갈 때까지가 가장 좋다. 뒷맛은 짧은 편. 파푸아 뉴기니 산골의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일까? 단맛도 느껴진다.(2017.5.31.)

이제 두 원두를 섞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1:1 비율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어요.

아로나의 향도 살지 않고 만델링의 바디감이나 뒷맛도 약한, 무색무취의 애매한 맛이 됐다. 약간의 꽃향기와 단 맛이 느껴지지만 그 뿐.(2017.6.13.)
ps. 이틀 정도 묵히고 마시니 비교적 향과 맛이 살아남. 로스팅 직후의 인상만으로 커피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확인.(2017.6.15.)

만델링 4, 아로나 1 비율로 하니까 아주 좋아지더군요.

비교적 성공적. 아로나의 단 맛이 만델링의 바디감에 더해져 길게 남는다. 아무리 봐도 만델링의 바디는 최고다. 향이 생각보다 약한 게 유일한 야쉬움. 다음번엔 3:2 비율로 해 봐야겠다. 산뜻한 봄바람 같은 맛이다.(2017.6.20.)
ps. 4일 뒤 약간 저온에서 추출하니 환상적인 맛.

대망의 3:2 비율은 어제 볶아서 오늘 마셨습니다만... 눈물이 날 정도네요. 이럴 때 인생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어쨌든 마실 때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

아로나의 향과 만델링의 바디감과 뒷맛이 어우러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맛이 됐다. 둘 다 단 맛이 나는 원두라서 단 맛까지 증폭되었다. 설탕 한 톨 넣지 안았는데 산뜻하고 고급스런 단 맛. 풀 로스팅에 가깝게 볶았는데도 쓴 맛도 거의 안 남. 향기와 바디감 모두 훌륭. 만델링처럼 뒷맛이 길게 남는 것도 좋다. 식후에 마시기엔 최고.(2017.7.15.)

헌데 블렌딩을 처음 해 보고 느낀 게...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어 간 게 맞는데, 뭔가 어디선가 마셨던 듯한 느낌이 듭니다... -_-;;; 그러니까 마실 때는 좋은데, 마시고 나서 기억에 안 남는달까 뭔가 평범한 맛이 된 느낌이랄까 그런 거예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대형 메이커들의 블렌딩 원두 같은 맛이... ㅎㅎㅎ 결국 블렌딩의 방향성이라는 게 딴 사람들, 특히 전문가들이 이미 해 본 방향대로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전문가들이 이 조합이 최상이다라고 판단하고 메이커들의 레시피에 적용된 내용대로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대형 메이커들의 블렌딩 원두가 맛이 없는 건 유통기간이 길어져서일 뿐이구요. 

커피란 게 하면 할 수록 대형 메이커들의 저력을 느끼게 되네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맛있는 걸 찾다 보니 오히려 개성이 없어지고 메이커들을 답습하게 된다는 게... 

싱글 오리진은 분명히 단점도 있지만 개성이 있고, 그걸 즐길 수 있다는 게 셀프 로스팅의 장점이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첫번째 블렌딩의 결론은 이거군요. ^^;;;;;

덧글

  • 2017/07/16 18: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함부르거 2017/07/16 18:37 #

    그러니까 말입니다. 싱글 오리진에서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걸 채워 넣다 보면 지향점이 비슷해지는 거 같아요. 차라리 부족한 부분을 감수하고 특정 느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발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블렌딩을 처음 시작해서 배울 게 무척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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