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경의 개인적인 기록들 by 함부르거

프랭클린 플래너 보관케이스를 재활용 하려고 2008년 케이스를 꺼내서 다시 보니까 참 재밌는 내용이 많네요. 이땐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기억도 되살리구요. 케이스를 재활용할까 했는데 그냥 놔둬야겠네요. 

그 때 다니던 회사에서 큰 사건이 터져서 사업본부가 날라가고 저는 그 참에 아예 퇴사를 해버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보니깐 사건이 1월 중순에 터졌는데 저는 이미 1월 초부터 퇴사할 결심을 하고 있었더군요. 사표는 1월 말에 내고... 그 달에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아주 폭풍같은 한달이었습니다. 그 때 적어놨던 내용 몇가지 인용해 보죠.

< 2008. 1.1. 기록 >

ㅇㅇㅇ(전 상사)과 오래 같이 할 수 없는 이유 
 - 남의 잘못은 오래 기억하고 잘한 것은 잊어버린다
 - 즉, 고생은 같이 해도 즐거움은 같이 못한다.
 - 고생에 대해 치하를 하더라도 빈 말로만 들린다. 칭찬은 허례허식, 화내고 혼내는 건 진심. 이러니 오래 같이 못하지

그 때 제 바로 위 팀장 이야기인데 이 사람하곤 모종의 이유로 아주 정나미가 떨어진 상태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적어 놓은 게 아주 인정사정 없군요. 뭐 지금 봐도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제 사감이 아예 없었다곤 못하겠네요.

< 2008. 1.30. 기록 - 이날 사표 제출>

"이 조직은 안된다"라고 생각한 이유
  1. 사람을 우습게 안다.(직원 소중한 것을 모른다.)
  2. 신상필벌이 없다.
  3. 원칙 없이 윗사람의 임의대로 움직인다.
  4. 사장이 소인배다. (사장 조카 봤을 때 알아봤어야 한다.)

사장 조카 이야기가 왜 나오냐면 사장이 그 전해인가 전전해인가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당연히(?) 직원들 총 출동해서 상가집 안내하는 등 상가집 일 보고 있었는데 어떤 아가씨가 맨발에 쓰레빠 질질 끌면서 빈소로 들어오더라구요. 옷은 나시 티에 반바지 입구요. 아니 뭔 애가 상가집 오는데 저 꼴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장 조카네요? 미국에서 왔다나 뭐라나. 아니 미국 사람은 조문하러 갈 때 그러고 갑니까? 자기 외할머니 빈소에 그 꼴로 오는 걸 보니까 집안 꼴을 알겠다 싶더군요. 그 때 때려쳤어야 하는데... -_-;;;;

여담이지만 한국 풍습 중에 가장 안 좋은게 무슨 조직이든 장 급이 상 당하면 직원들 총 출동해서 상가집 일 보는 거라고 봐요. 직원들이 상 당하면 기껏해야 봉투나 보내면서 말이죠. 그 사이에 조직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이며 조직원 간에 무슨 차등을 그렇게 두는 걸까요. 공사구분이 안되는 거지요. 한국이 아직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 단적인 증거라고 봅니다.

사표 제출하고 나서도 일 이야기로 플래너가 빽빽하네요. 그만두기로 했으면서 뭘 그리 열심히 했는지 참... 아마 마무리는 확실히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 그 때 저말고도 그만 둔 사람들 많았네요. 사내 커플이 결혼했는데 그 중에서 부인 쪽은 사표 낸 사람도 있었고... 하여튼 사람들이 참 잘 그만두는, 아니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조직이었습니다.

그 때 사표 내고선 주말에는 여기저기 참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개발자 컨퍼런스 같은 곳도 가고... 다시 직장 다니면서부터는 그런 게 줄어든 게 좀 아쉽군요. 그 때 회사 일이 힘들어서 잠시 휴학하고 있던 대학원도 다시 나갔네요. 퇴사하기 전에 이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게 왜 이걸 보고야 기억이 나지... ^^;;; 사표는 1월 말에 냈지만 진짜로 그만 둔 건 2월 말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가장 큰 고민은 경제 문제였네요. 소액이지만 회사 다니면서 대출 받았던 것도 있었고... 그런 거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퇴사하고 한달 정도 지나서 회사에 대한 기록을 다시 적었습니다.

< 2008. 3.27. 기록 >

XXXX 본부가 실패한 이유
  1. 원칙과 비전의 부재 - 매출목표만 있고 나머지가 없음
  2. 포용성 부족 리더십 부재 - 개성 있는 인재를 모두 놓침
  3. positioning 실패
  4. IT에 대한 몰이해

ㅇㅇㅇ도 결국 말만 있었지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헤맸다
  - 윗사람들과는 커뮤니케이션 잘 함
  - 아랫사람들에게는 강압과 비난, 강요로 일관

나 자신 : 협상력이 부족했다. 직급만 생각해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제 자신에 대한 반성도 있습니다. 일개 직원 신분이라고 생각해서 주도적으로 일을 만들 생각을 안 했거든요. 첫 직장이라 경험도 부족하고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였던 게 크죠. 직급 빼고 사내 위치만 놓고 보면 제가 그 분야의 일을 주도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건 제 능력과 마인드 부족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네요. 그래서 ㅇㅇㅇ 같은 상사도 만난 거고.

그 밖에 제가 있던 본부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부연하자면, 1은 보이는 바와 같습니다. 2는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데, 그 때 회사 이름 보고 입사한 인재들이 많았거든요. 진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좋은 게 많았어요. 그 사람들을 못 버티게 하고 나가게 만든 게 그 당시의 경영진들이었죠. 결국엔 그 경영진들이 다 말아 먹었고 말이죠. 내가 뭘 보고 그 회사에 3년이나 있었는지... 입사 1년 째에 유능한 베테랑 직원을 계약직이 처우개선 요구한다고 자를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3은 그 때 회사의 전략이 참 모호했습니다. 당시 업계가 압도적인 1, 2위 업체가 있고 그 밖의 업체들이 올망졸망 하던 때였죠. 우리 회사는 그 올망졸망한 회사 중 하나였고... 이런 위치면 뭔가 신시장을 개척하던가 투자를 통해서 선도업체를 따라잡던가 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제대로 못했어요. 투자는 위에서 말한대로 사장이 소인배라(...) 몇 억 투자하는 것도 벌벌 떨었으니 될 리가 없었죠. 노후되서 자꾸 고장나는 서버 하나 교체하는 것도 결재 받는 데 한달씩 걸렸으니 투자가 말이나 되나요. 그 때 알아보고 퇴사했어야 하는데... ㅠㅠ

그렇다고 니치마켓이라도 잘 뚫었느냐면, 경영진의 능력부족으로 할 때마다 말아먹었습니다. 시장조사 하나 안하고 웹사이트 만들고 컨텐츠 채워 놓으면 사람들이 돈을 내겠지 하는 식이었으니 될 리가 있어요? 게다가 웹사이트도 엉망으로 만들어 놔서 뭐 하나 볼려면 30번인가 클릭을 해야 하는 구조였으니 그게 잘 되면 세상에 정의가 없는 거죠. 제 후배 개발자가 30번 클릭을 지적하니까 코웃음 치면서 무시하던 부장 녀석(박사)은 사업 말아먹고 퇴사하더니 어디 교수로 갔다고 하더군요. 지금 잘 사나 몰라. -_-+;; 제가 박사들 싫어하는 게 그 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는 위에 사례를 봐도 알겠지만, 당시 간부들 중에 IT 베이스인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뭐 꼭 IT 전공자라야 IT를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이 사람들은 IT의 특성에 대해 하나도 몰랐어요. 뭔가 계획이 있고 비전이 있어서 사업하는 게 아니라 그 때 그 때 웹사이트 만들고 돌리면 되겠지 하는 식이었죠. 웹사이트 만들고 운영하는 걸 다 직원이나 외주에 맡겨 버리고 자기들이 관심 있는 거에만 집적거리니 뭐가 될 리가 있습니까. 자기들은 IT 업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사를 IT를 통해서 하는데 뭔 IT 업체가 아녜요. 직원들은 나름 자질 있는 사람들 뽑았지만, 아무리 좋은 학교 나왔어도 신입은 신입이예요. 신입들한테 IT 운영을 다 맡겨 놓고도 회사가 굴러 갔으니 참 대단하긴 하네요. -_-;;;; 차라리 전부 외주로 돌렸으면 정상적이었겠습니다. 지금은 그러고 있는 것 같더만. 뭐 당시 1위 업체도 IT 베이스가 아니었긴 한데 거긴 돈이 많았거든요. 거긴 돈으로 때려 박아서 다 해결하는데 여긴 그러지도 못하고 참... 

이후에 2008년 한해는 백수로 지냈는데 그냥 놀진 않았네요.  무슨 청소년 독서 모임 멘토도 하고,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외환예금 가지고 수익도 좀 올리고... ㅎㅎㅎ 

10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 보니깐 재미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기록이란 게 일단 해놓고 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이렇게 다시 들춰 보면 이야기거리가 나오니 말입니다.

덧글

  • 2017/11/09 21:00 # 삭제

    고생하셨군요.;;
    어디나 현장과 괴리된 지도부의 문제점이 크네요
  • 함부르거 2017/11/10 09:06 #

    뭐 이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옛날 일이죠. ^^
  • 2017/11/10 17: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1/10 17: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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