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대선 일정이 예산과 정치에 미치는 영향 by 함부르거

"예산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명제가 있다. 다소간 우스개 소리로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세상 모든 일은 돈이 있어야 움직이고 예산이란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갈 지 결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 가정의 예산에서부터 국가의 예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산 결정과정은 치열한 파워게임의 현장이다. 이번 달 초에 결정된 2018년도 국가 예산도 그런 파워게임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그리고 파워게임은 결국 가장 권력이 강한 자가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이다.

대통령의 권력이 가장 강한 때가 언제일까? 많은 이들은 바로 당선인 신분일 때가 가장 강하다고 말한다. 대통령 취임식 직후부터 그 권력은 약해진다고 말이다. 과언이 아닌 게 임기가 정해져 있는 권력자는 임기 초가 가장 강하고 임기가 다해갈 수록 권력이 급격히 소멸하는 속성이 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헌데 1987년 제6공화국 성립 이래로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임기 초 권력이 가장 강할 때 예산 결정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다. 위에서 예산은 파워게임이고 파워게임은 권력이 강한 자가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이라고 천명한 것을 기억해 보라. 가장 권력이 강한 사람이 가장 강할 때 영향을 못 미친다고? 얼핏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예산의 결정 과정을 알면 매우 쉬운 이야기다.

대한민국에서 한 해 예산의 시작은 그 전년도 초에 시작된다. 기획재정부가 그 다음해부터 약 5년에 걸친 중기재정계획을 각 부처에다 요청하는 시기가 바로 1월이다. 그러니까 '19년도 예산은 이미 '18년도 1월부터 짜기 시작한다. 각 부처에서 다음 년도 예산요구를 작성해서 기재부에 넘기는 때가 늦어도 6월이다. 각 부처의 요구를 받아서 기재부에서 줄이고 깎고 다듬어서 정부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는 게 8월 말이다. 국회에서 여야가 정부안을 심의해서 깎고 늘리고 쿵짝쿵짝 해서 예산을 확정하는 게 12월 초다. 

87년 제6공화국 성립 이래로 대한민국 대통령은 선거가 있는 해 12월에 당선되서 다음 해 2월말 경에 취임해 왔다. 무슨 말이냐면, 취임하는 해의 예산은 이미 이전 정부에서 결정한 다음이라는 거다. 대통령이 야심차게 뭘 해보려고 해도 예산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덕분에 항상 대통령의 임기 첫 해에는 추경예산 짜는 게 핵심 이슈가 되고 많은 정치력이 여기에 낭비되어 왔다. 30년 동안 노태우부터 503까지 6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5년마다 항상 이랬다. 6공화국 체제에 큰 변동이 없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런.데. 2017년에 이 상황에 매우 큰 변동이 생겨 버렸다. 다들 알다시피 이름을 말하기 싫은 자가 탄핵되면서 조기 대선이 치뤄진 것이다. 모든 일정이 바뀌었다. 

이제 또 탄핵이나 개헌 급의 큰 변동이 없는 이상 대통령 선거는 3월 경 치뤄지고 새 대통령은 5월 경에 취임한다. 이건 설령 개헌으로 대통령 임기가 바뀐다고 해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헌하면서 대통령 임기를 4년 3개월 이런 식으로 꼬아 놓는 미친 짓을 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면, 여기까지 읽었으면 다들 알겠지만, 대통령의 권력이 가장 강할 때 예산안을 짜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거다.

3월이면 일 좀 빨리 하는 부처에서는 사업계획에 따른 예산안을 얼추 짜 놓는다. 5월이면 대부분의 부처에서 자체 예산안(부처안)을 거의 확정해 나간다. 그런데 이 시기에 대선이 있고 당선인이 자기 정책방향과 관심사업을 내놓는다면? 모든 예산안이 - 설령 100년전부터 하던 사업이라도 - 대통령의 관심에 맞는 방향으로 최소한 포장이라도 바꿔서 나온다. 우리 나라 공무원들 순발력 엄청나다.

이게 올해부터 벌어진 일이다. 각 부처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부터 이미 공약사항 가지고 온갖 사업들을 추가하고 있었다. 무조건 깎고 보는 기재부도 공약사항이나 국정과제 관해서는 그렇게 후하게 퍼줄 수가 없었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많이 짤리긴 했지만 18년도 예산안은 거의 대통령의 의향대로 됐다고 보면 된다. 정권 초기의 파워란 그렇게 강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 초부터 예산 결정과정에 관여한 대통령이다. 앞으로의 대통령들도 그럴 것이다.

난 이 3월 대선 5월 취임의 일정이 매우 절묘하다고 생각한다. 각 부처에서 예산안을 막 작성하고 있는 시점에 등장하는 새 대통령이라니 무시무시하다. 이 때는 각 부처에서 계획하는 사업들에 대해서 세세하게 조율할 수 있다. 임기 초반부터 하고 싶은 사업을 마음대로 기획할 수 있는 거다.

만약에 한 7월 쯤 대선 치뤄서 9월쯤 취임한다고 하면, 다음 해 예산에 대해 그렇게 세부적인 간여는 못한다. 각 부처 안이 확정된 다음이니 기재부에서 몇 가지 끼워주는 정도가 된다. 8월~10월 대선이면 국회에서 대통령이 원하는 사업을 끼워줄 순 있지만 이것도 그렇게 세부적인 업무계획을 짜 넣을 수는 없다. 11월~12월이나 1월~2월이면 기존과 큰 차이 없다. 

물론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하자는 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진 않는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기를 쓰고 깎으려고 들 거다. 그러나 국회의 정치력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굵직한 것들 외에는 거의 대통령 의향대로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몇 조원짜리 일자리 사업이나 토목공사 사업 같은 건 목숨을 걸고 깎겠지만 - 실제 그래왔지 않나? - 몇억원 짜리 연구용역이나 몇십억원짜리 정보시스템 구축 사업 같은 건 그냥 통과된다.

국가정책이란 게 그 시작점은 몇 장짜리 보고서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게 토네이도가 성장하듯이 덩치를 키워 가며 거대한 정책이 되는 거다. 사대강이 그랬고 세종시가 그랬다. 그런 조그만 시작점은 아까 말한 몇억짜리 연구용역, 몇십억짜리 정보시스템이다. 거대한 국가 예산에서 그야말로 눈꼽만한 조각 밖에 안되지만, 다른 큰 부분들을 조종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앞으로의 대통령들은 임기 초부터 그런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디테일한 부분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자라면 정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일정 변화의 효과를 사람들이 체감하기 힘들다. 여전히 행정부는 루틴대로 돌아가고 국회는 발악하고 국민들은 고생할 거다. 그러나, 대선이 한번, 두번, 세번 계속 거듭될 수록 그 효과는 증폭될 것이고 이를 활용하는 방법도 깨우치게 될 것이다. 대선이 몇 달 앞당겨진 것에 불과하지만, 그 변화는 정치 일정을 바꾸고, 정부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나아가서 정치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될 거다. 

왜냐면, 이런 일정 속에서는 국회도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권 초에 정부가 예산안을 들고 나왔을 때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면 끌려가게 된다. 12월 대선 일정일 때는 1년간 정부 하는 걸 보면서 대응할 시간이 있었지만 3월 대선 일정에선 그럴 시간이 없다. 그 해 예산안에서 디테일을 못 골라내면 정권 내내 정부가 제시하는 어젠다에 끌려 다닐 뿐이다. 국회, 특히 야당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일정 변동은 결국 한국 정치, 특히 정치인들의 질적 변화를 끌어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시간은 많이 걸릴 것이다.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지금은 정치인들이 이런 일정 변동의 효과를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내년부터 아주 서서히 깨닫게 되겠지. 

후대의 역사가들은 2017년을 대한민국 정치의 질적 변화가 시작된 해로 기록하게 될 거다. 그리고 이 질적 변화가 완료되는 때, 한국은 다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덧글

  • 2017/12/18 11:31 # 삭제 답글

    역시 예산이란 중요하군요..
    이제부터의 대통령들은 임기초부터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얻었단 얘기군요
  • 함부르거 2017/12/18 11:35 #

    몇 개월 차이지만 큰 변화가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12월 대선으로 인한 예산 문제는 사실 예전부터 많이 이야기 되던 거예요.
  • ㅋㅋ 2017/12/18 14:04 # 삭제 답글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군요.
  • 함부르거 2017/12/18 14:17 #

    6공화국 체제 출범 30년만에 이렇게 됐으니 말입니다. 역사가 정한 필연으로까지 느껴지는군요. 30년간 대통령의 권한이 계속 작아지는 과정에 있었는데 올해부터 반전의 계기가 생겼습니다.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7/12/18 20:30 # 답글

    그러나 쪽지 예산과 다 해먹어놓고 쇼하는 장면을 보면... 언제까지 눈 뜨고 코베이는 짓이 통할까란 말이 나옵니다. ㅠㅠ
  • 함부르거 2017/12/18 21:44 #

    쪽지 예산이야 해마다 있는 거고 예산 갈라먹기야 맨날 하는 거죠. 민주주의 국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보는 건 예산을 둘러싼 권력관계에 약간의 차이점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장기적인 모멘텀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낼 거라고 보는 거구요. 지금 당장은 별다른 변화를 느끼기 힘들지만 앞으로 20년, 30년 쯤 놓고 보면 아주 많은 변화를 낳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 채널 2nd™ 2017/12/19 09:03 # 답글

    의외로 ...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 대체 예전에는 왜 12 월 중간에 대선을 하게 되었는지요?

    (그러니까, 이번의 이니찡의 경우에는 스타트 버프를 입빠이 받아서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아도 될까요?)
  • 함부르거 2017/12/19 09:36 #

    예전에는 대통령이 예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간이 3년이었다면 이제부턴 4년으로 늘어났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1년 정도 더 기회가 생긴 거죠.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정책이 얼마나 올바른가, 공무원들 통솔을 제대로 하는가에 달렸지만요.

    전에 12월에 대선을 하게 된 건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죠. ^^;;;;; 87년 6월 항쟁 결과로 개헌부터 하고 대통령 선거 치르다 보니까 일정이 그렇게 맞아 떨어진 겁니다. 해놓고 보니 신임 대통령이 첫 1년 예산을 어찌 못하더라는 문제가 부각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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