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폭탄 만들기 by 함부르거

[긴 글 읽기 싫은 분들을 위한 요약] 핵무기란 게 뭔지, 어떻게 개발됐는지,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알고 싶다면 전작 원자폭탄 만들기와 함께 일독을 권할만한 책.


이 책을 처음 접하면 일단 왠만한 사전 이상의 두꺼운 볼륨에 놀랄 것이고, 읽어 보면 술술 읽힌다는 점에서 또 놀랄 겁니다. 전작인 원자폭탄 만들기가 1986년에 나온 지 9년만인 1995년에 나왔지만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죠. 소련이 붕괴되었고, 구 소련의 수많은 비밀문서가 해제되었습니다. 아마 그 일련의 사건들이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오긴 불가능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구 소련 자료가 많이 인용되서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수소폭탄은 미소 양국의 핵 경쟁 분위기 속에서 개발이 가속되었기 때문에 소련이 어떻게 핵무기를 개발했는지 묘사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핵무기 정보를 캐내기 위한 소련의 스파이 활동입니다. 기름기 쫙 뺀 첩보물을 보는 느낌이라 개인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수박 겉핥기이긴 하지만 관련 분야에 잠깐 몸 담았던 적도 있어서 더더욱 그랬죠. 늘날까지도 '러시아인 = 스파이' 같은 공식이 통용되는 것은 40년대 소련의 광범위한 첩보 활동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이 부분이 재미 없게 느껴지는 분들도 많은 모양입니다만 저한테는 무척 재미 있었어요. 원래 스파이 활동의 대부분은 수수하게 진행된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더군요.

소련의 핵개발에서 미국에서 빼돌린 첩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만, 그게 전부인 양 말하는 것도 부당한 일입니다. 소련의 과학자들은 단순히 미국 핵폭탄을 베끼는 게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고 독자적인 설계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초기 단계에서 미국 걸 거의 그대로 베낀 건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어마무지 끔찍한 의심병 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첩보의 가치는 소련이 핵개발 과정에서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게 해 준 데 있습니다. 첩보가 없었더라도 소련 과학자들은 핵무기를 만들어 냈겠습니다만, 베리야가 몇 명은 목 메달고 몇 명은 굴라그로 보낸 다음이 됐을 겁니다. -_-;;;

저는 소련을 위해 첩보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면면이 흥미로왔습니다. 클라우스 푹스나 도널드 맥클린처럼 완전한 확신범들은 오히려 별로 흥미롭지 않아요. 이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이념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던 건 이들이 마침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부분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해리 골드,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처럼 이념보다는 한 때의 충동이나 분위기를 타고 첩보원이 된 사람들이 더 흥미롭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공작원에 의해 포섭되는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이상적인 충동에 의해 시작합니다. 골드는 미국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반감을 느꼈고 그린글래스는 전쟁 중인 동맹국 소련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에 설득됐죠. 하지만 첩보활동이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그 때부터는 협박을 당합니다. 간첩활동을 공개해 버리겠다는 건 사실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지만, 협박 당하는 당사자는 그런 걸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돈과 훈장 같은 약간의 기름칠이 더해지면 하기 싫어도 계속 스파이 노릇 하게 되는 거죠.

가장 웃기는 부분은 저 미국인 간첩들에게 훈장 주면서 모스크바의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자랑하는 거였습니다. 미국인들이 모스크바 지하철을 탈 일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푹스나 로젠버그 같은 자발적 첩보원들에게도 같은 대우를 했다는 건 베리야와 NKVD가 인간의 선의를 전혀 믿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푹스 같은 순수한 인물은 물론 돈 같은 건 거절했습니다만.

전작에서 많이 다루었던 물리학적 문제들은 이 책에서는 비중이 작습니다. 그 가능성조차 불확실했던 원자폭탄에 비해 수소폭탄 개발은 전작에서 말했듯이 공학적 문제로 변했기 때문이죠. 물론 텔러-울람 메커니즘이라는 중요한 돌파구가 필요하긴 했습니다만 언젠가는 개발될 물건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수소폭탄을 개발하게 만든 정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만큼 핵무기는 정치적인 것이고 그걸 개발하게 만든 환경과 심리적인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겠죠. 물론 핵무기 개발자들의 일부는 정치적인 문제는 모르겠고 일단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고 본다는 마인드가 있었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죠. 어느 누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보고서, 소련의 간첩활동과 핵무기 개발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걸 전혀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물리학적인 문제로만 핵무기를 대할 수 있었겠어요?

에드워드 텔러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란 게 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모델입니다. 수폭 개발에 대한 편집증과 업적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 끝 간 데를 모르는 똥고집 등등 주변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만들던 사람이죠. 텔러가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고 나서야 수폭 개발이 오히려 가속될 수 있었습니다. 텔러는 타인과 협조가 안되는 사람은 아무리 천재라도 업적을 세우기 어렵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석기시대 매니아 커티스 르메이 장군... 그냥 이 양반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유능한 인간이 미친 목표에 대해 정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아주 잘 보여주는 사람이죠. 50~60년대 미국 대통령들이 조금만 판단 잘못했으면 핵전쟁이 벌어졌을 겁니다. 이 양반에 대해서는 ㄷㄷㄷ 말고는 말을 못하겠어요. ㄷㄷㄷ 

사실 50년대에 미국 전략공군 사령관을 맡을 만한 사람은 르메이 외엔 없었습니다. 아주 거지 같은 상태였던 전략공군을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어서 언제든 전쟁 가능한 준비태세를 갖추게 만든 것은 분명 르메이 장군의 공이지요. 하지만 이 양반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가서 하루라도 빨리 핵전쟁을 해서 소련을 조져버리자는 게 필생의 과제였다는 게 참... ㄷㄷㄷㄷㄷㄷ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대로입니다. 핵무기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지만 미소 양국은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비축했고 결국 소련이 미국 따라가다 망한 건 주지의 사실이죠. 미국조차도 상당한 대가를 치뤄야 했구요. 저자도 지적하지만 그렇게 많은 핵무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몇 발만 있어도 있는 게 핵무기고 억지력으로 작용합니다. 냉전시절 미소 양국이 각각 3만~4만발씩 핵탄두를 갖고 있었던 건 그야말로 집단적 광기 외에 다른 설명이 안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미국도 러시아도 각각 6천여발 정도 있습니다. 다른 핵무기 보유국들은 많아야 수백발이죠. 그래도 그정도면 핵전쟁에 대한 억지력으론 충분한 겁니다. 중국 경제가 크게 발전했지만 핵탄두 보유량은 크게 안 늘리는 건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핵탄두의 심리적 억지력 효과를 크게 믿는 건 북한이 아닐까 싶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두발만 있어도 있는 게 핵이고 그 억지력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게 북한의 전략적 방침인 거 같은데 과연 그게 잘 될까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면서 생각할 과제로 던지고자 합니다.

핵무기가 조만간 전 세계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목적과 용도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무기는 파괴 수단으로서 이미 오래 전에 그 용도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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