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by 함부르거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습니다. 이젠 그도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갔으니 평가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그 시대를 산 사람이 많이 살아 있으니 좀 이른 느낌은 있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노태우는 공이 과보다는 큰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의 과도기에서, 그는 의회를 존중함으로써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습니다. 삼당합당은 당대엔 비열한 수작이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의회를 장악하는 자가 정치를 장악한다.'는 대의민주주의 원리가 한국에서도 확고히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즉 대통령이 나서서 의회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첫번째 사례가 된 것입니다. 그게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의 집권기엔 민간에서의 민주화 열망이 폭발했습니다. 학생운동은 더욱 세가 커졌고, 노조 운동도 활발했습니다. 그는 그 모든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일관했습니다. 우리 나라 노조들이 강경일변도의 투쟁적 조직으로만 발전하게 된 것은 상당부분 그의 책임입니다. 학생운동은 전두환 때와 별 다를 바 없이 탄압받았지요. 그의 시대에 발생한 희생들이 과연 필연적이었는가는 의문입니다.

북방외교는 누가 봐도 그의 제일가는 업적입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공산진영이 해체되던 격동의 시대에 그는 소련, 중국 등 과거의 적들과 과감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굳은 의지로 수교를 관철시켰습니다. 덕분에 한국은 새로운 시장을 얻었고, 보다 열린 사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을 고립시킨 것은 덤이구요. 격동의 시대에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외교를 추진한 모범사례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 혜택을 보고 있지요.

경제면에서는 전두환 시대의 경제정책이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삼저 호황이 계속되던 때라 딱히 경제정책에 손댈 이유가 없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대에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대가 넘었고 - 요즘 보면 미친 성장률이죠. -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크게 올랐습니다.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자동차가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시대부터였습니다. 다만 급속한 경제성장만큼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운 점입니다. 잘나갈 때 정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그의 탓을 하긴 어렵지만요.

문화면에서는 여전히 군사정권 시대의 검열과 탄압이 있었지만 차츰 완화가 시작됐습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그는 자신에 대한 풍자를 어느 정도 용인했고 덕분에 정치 풍자 개그맨들이 큰 인기를 얻었지요. 일본 문화가 차츰 수입되기 시작했던 것도 그의 치세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드래곤볼 같은 일본만화 전성기 작품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죠. 해적판이 많았지만요. ㅋㅋ

종합하자면 그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바뀌는 과도기를 잘 관리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군사정권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오히려 덕분에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갔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물태우'라는 별명은 처음엔 그를 비웃는 것이었지만 지금 보면 격동의 시대를 물 흐르듯이 따라간 그의 유연한 처세를 상징하는 별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기엔 그가 자행한 쿠데타와 학살의 책임이 너무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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